2020. 5. 18. 21:00ㆍ도시와 건축/이야기
서울에서의 하루. 아침 일찍부터 시내로 나가 충정로-서울로-남대문 시장-을지로-종각-종로 3가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저녁 약속을 앞두고 시간이 남아 계획에는 없었던 익선동을 잠시 둘러보았다. 2011년 전후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2016년 익선동의 미래 글에 썼던 것처럼 내가 알던 익선동은 없었다.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선 익선동을 잠시 둘러보며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대한민국 도시 구역 중 건물 총면적 당 카페/식당/상업시설의 면적 비율이 제일 높은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옛 글에 썼듯이 1층 한옥이 얼마나 비(대) 도시적인 건물일 수밖에 없는지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 한옥 유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방치되어있던 거주공간의 물리적 매력만을 보고 들어온 익선다다와 같은 문화 투기꾼과 이를 방치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익선동이 카페 동네로 변한 것은, 인기 있는 지역이 된 것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과거에 중장년층의 거주 지역이었던 익선동은 이제는 젊은 연령층이 붐비는 핫플레이스로 변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어도, 익선동이 이렇게 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여전히 수두룩할 것이다.
동네 내부적으로는 이 변화의 과정 동안 (아마도 지금도) 갈등이 존재했겠지만,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에겐 이 익선동은 과거 한옥밀집지역으로 조성된 매력적인 역사를 가진 핫한 지역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익선동과 같은 도심 저소득층 거주 지역이 서울 내에는 여전히 많다. 그리고 그 장소들은 한결같이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건물이 낡고 오래된 경우가 많다. 익선동 같은 경우는 한옥이라는 마케팅하기 정말 좋은 물리적 장점과 종로에 인접한 지리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주요한 특징 만을 바라본 이들이 상업화를 급속도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 어떤 보호 장치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문화를 활용한 도시 재생에는 문화를 선도하는 이들이 앞장을 선다. 그들은 엘리트이고, 그들의 주장은 따라야 할 것 같은 선진적이고, 정의롭고, 꼭 이 곳에서 해야만 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떤 공개적인 갈등(월인 공방과 익선다다 간의 갈등)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지속적인 반론(시민/세입자 운동 등)이 제기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보통 힙한 XX 거리나 핫플 등의 이름이 붙는 성공적으로 변화한 지역으로 소개될 뿐이다. 아래의 기사처럼 말이다.
이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익선동은 외형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을 뿐이다. 동네와 마을은 원래 이곳에 존재했다. 이들이 주목할 것은 이 지역의 상업적 가치(가능성)이었을 뿐이다. 이곳에 "느림과 쉼의 미덕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그럴싸한 구호를 내걸었지만, 그 말의 주체가 결국은 "이 마을을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모순이 존재한다. 시민이 멀쩡히 살던 동네의 사회적 환경이 완전히 변해버렸는데, 아무런 대응 없이 방치하고 있는 서울시/종로구 역시 끔찍할 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도시 개발에 있어서 체계적인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선 이런 식의 외형적인 도시재생이 만들어낸 결과물조차 (자본가, 투자가, 지자체건 누구건 간에) 그들이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은 채, 도시/동네를 그리고 나아가 사회를 생각한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이미지 메이킹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도심의 저밀도 주거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당 지역이 고밀도의 재개발이 어렵다면, 차라리 상업화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상업적으로라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을 바란다. 근데 그것은 최소한의 공정한 관리와 감독을 거쳤을 때나 해당되는 생각이다. 저밀도 주거지가 카페/갤러리촌이 되어가는 동안 정부는 지차체는 어디 있었나? 사회 구조/용도가 5년 만에 급변하는 동안 그런 사회 변화를 관리 감독해야 하는 책임자들 어디 있었을까? 문제점을 인식이나 했을까? 이 모든 현상을 외면한 서울시 정부와 종로구에게는 사회적 책임과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시민 보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밀려난 세입자는 적절한 (임시) 임대주택을 제공받았는지, 세입자/집주인/사업가 간의 협상 간 그리고 갑을 간의 억압은 없었는지 등을 물어야한다.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업에서 그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떠났다는 것은 도시재생이라는 말 자체가 허구일 뿐임을 의미한다. 물리적인 도시재생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업은 원주민의 재정착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 외의 계획은 다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고, 기존의 철거식 재개발/재건축에서 명칭을 바꾼 채로 약간의 개발 방식만 변화시킨 것뿐이다.
누군가는 핫한 카페거리를 위해 오랫동안 살아온 집에서 떠나갔다. 당연한 사회의 변화로 여기며 수긍하고, 어쩌면 이주비와 보상비 등 소소한 보상을 받아서 떠났을 것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서울에서 찾아간 익선동의 미래는 현재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원주민의 삶을 보전하지 못하는 사업이 허가되는 사회에선, 계속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지역은 돈의 흐름을 따라, (부동산) 투자자의 손길에 따라 익선동처럼 변할 것이고, 그 과정 중에는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도심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축출(Verdrängung)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익선다다 등이 의도했건 안 했건 사회적 약자를 공간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서울로 7017 사업으로 밀려난 노숙자들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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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서울에는 정말 카페가 많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 카페엔 사람이 꽤 있다. 카페 자체가 원래 위탁된 개인 공간의 역할을 해왔는데(스터디룸과 같은), 서울이나 몇몇 대도시에서는 카페라는 상업 공간이 어떤 공공 공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사용료를 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 공간 말이다.
물론 익선다다와 두 창업자가 문제인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단편적인 비판이다. 익선동의 변화엔느 도시 계획, 도시 정책, 세입자 정책, 복지 정책, 사회적 인식 등 너무 많은 게 얽혀있고, 이 중 비판하기 제일 쉬운 것이 익선다다일 뿐이다. 하지만 개인의 행동을 향한 비판은 사회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익선동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 재생은 "재생"이라는 용어에 집중해서 보자면, 상처 나거나 부러진 곳을 재생시키는 접근이 아니다. 보통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잘라낸 뒤, 팔 위치에는 뉴욕산 팔을, 다리 위치에는 파리산 다리를 이식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과 영국 도시 쪽 부속품도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복지 열풍으로 북유럽 도시 쪽 부품도 사용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도시 재생 관련해서 딱히 쓸게 없는 모습으로 보인다.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이 없다면, 결국 자기가 사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일반적인 외국인 관광객과 큰 차이가 없다. 익선동을 찾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젊은 감각을 채워줄 새로운 갤러리, 상점, 카페, 식당이 더 들어서며, 결국 여기나 저기나 다 비슷한 서울의 흔한 뜨는 동네가 되어가고 있다. 그 변화는 외부 유입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것은 명백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상업화로 인한 영향이다.
베를린 역시 도심 곳곳에서 오래된 상점이 문을 닫고, 힙한 카페가 들어섰다. 오래된 단골 손님은 줄고, 신규 베를리너와 관광객이 늘어나며, 그런 수요에 맞는 새로운 상점들이 들어선다. 그 흐름 속에서 개개인들이 의도했건 안 했건 해당 지역을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을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변화시킨다. 세상엔 그런 곳이 너무 많고, 그것이 (사회적) 문제인 것을 모르는 사람도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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