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곡집의 그 장소를 찾아서 그리고 소셜 해킹

2020. 5. 12. 01:00도시와 건축/이야기

피아노 소곡집 1권 표지

도시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와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특정 이미지로 해당 지역을 추론해내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도시의 외적 특성이 건물(때로는 공원 등의 도시 자연)의 이미지와 형태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기술의 발전과 지도/사진 데이터가 늘어나며, 이런 방법은 때론 손쉽게 스토킹 혹은 소셜 해킹이라는 범죄의 영역에서 활용될 때가 많다. SNS에 집 밖 풍경이라던가, 실시간으로 머물고 있는 장소의 풍경을 찍어 올리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019년 2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피아노 소곡집 표지 속 추억의 장소 찾기는 그래도 조금 훈훈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작은 바로 아래 링크의 트윗. (사실 나도 피아노 소곡집으로 피아노 배웠을 것 같은데, 표지 기억은 전혀 없다) 직접 추억의 장소 찾기 모험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그 과정을 좀 정리하면서, 당시 고민했던 점을 함께 적어본다.

 

카스티야의 촉촉한 빵 on Twitter

“어릴적 피아노 소곡집 표지가 넘 낭만적이여서 어딜까 늘 궁금했더랬다 크고보니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 세광출판사에 여기가 어디냐고 문의가 많이 오는데 문제는 자기들도 모른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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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권 겉표지 속 장소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일 년에 세 네 번은 겉표지 장소가 어디냐는 전화를 받는데, 당시 책을 담당했던 분들이 모두 퇴사해 안타깝게도 사진 속 장소를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2권 표지는 영국 버킹엄 궁이지만 1권은 건물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출판사에 전화한다고 합니다."

피아노 소곡집을 내놓은 세광출판사에서도 스스로도 배경을 모른다고 하는 (아마 과거에는 흔히 있었던 사진 도용...) 이 장소에 대한 추측이 하나 둘 시작되었다. 우선 유럽의 어딘가 일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지역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건물 굴뚝 형태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는 절대 아니고, 프랑스 쪽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라며, 우선적으로 건물의 굴뚝 형태를 바탕으로 중유럽, 동유럽은 아니라고 단정을 지었다.

단서 중의 하나 원뿔형 지붕

표지 사진에서 찾아낼 수 있는 단서는 다음과 같았다.

  1. 건물 양식/ 자재 (원뿔형 지붕: conical roof)
  2. 공원의 형태/ 펜스 스타일
  3. 공원의 식생
  4. 사람들의 의복
  5. 피아노 소곡집 1은 1990년 3월 31일 출간됨. 늦어도 1989년에 찍은 사진일 것이고(날씨/계절 상, 1990년 1~3월은 불가능), 또한 그 당시 여행 가능한 국가여야 함.

이를 바탕으로 트위터 내에서 수많은 추측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검은색의 정원 담장의 스타일이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피아노 소곡집 2권의 표지 장소는 런던 버킹엄 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글 검색을 통해서 꽤 유사한 형태의 담장이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공원(St James's Park)에 있음을 찾아냈다.

이런저런 검색과 추측 끝에 한번 더 단서를 바탕으로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1. 건물의 형태는 독일 혹은 독일 기준 동쪽 지역의 유럽 국가 스타일은 아님.
  2. 공원이라기보다는 진입 막는 낮은 울타리가 있진 정원의 기능도 포함한 곳/ 펜스 스타일 상(그리고 소곡집 2권의 배경이 런던이라) 런던인 확률이 높음.
  3. (런던 쪽임을 추측할 단서 중 하나로) 지역의 기후적 상징과도 같은 장우산을 든 남성.

그리고 의복 관련해서 중요한 단서가 하나 발견된다. 바로 서양 여성복의 형태상(옷섶이 좌임) 사진은 좌우 반전이 되었다는 것.

 

Poo-Sung Park on Twitter

“@ObserverofCity 서양 여성복은 옷섶이 왼쪽에 있는 좌임이니까 이 사실로도 사진이 좌우 반전되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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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소곡집 1권 표지의 좌우 반전

실제 피아노 소곡집 1권 표지의 사진은 좌우반전을 해야 했고, 그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풍경을 추측해야 했다. 그렇게 다시 사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건물은 높지 않은 언덕에 자리 잡은 유럽식 맨션/빌라 정도로 보였고, 자세히 보면 나무 사이사이에 언덕을 휘감아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런 느낌이 날 것 같은 런던의 주요 공원을 지도로 다 훑어봤지만, 저런 건물 지붕이 공원 내외로 있는 곳은 없었다.

만일 이 곳이 런던이라면 주요 공원 내에 있었지만, 1. 건물이 헐렸거나 좀 심하게 리노베이션이 된 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아니면 의외로 2.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공원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3. 영국 풍의 정원을 조성해놓은 (백인이 주로 거주하는) 제3의 장소라는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다.

한창 추측을 하던 중 몇몇 사람들이 더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분석을 종합해서 최종 위치가 밝혀졌다.

1. 우선 지형, 분수, 펜스 모양 등을 바탕으로 에든버러의 프린스 스트리트 정원(Princes Street Gardens)과 유사하다는 추측 트윗이 올라왔다. 분수 끝 형태에서도 단서를 잡아냈다.

 

고독한 이쫄기 on Twitter

“@VitaActiva 에든버러에 있는 princes street gardens에 있는 분수에요 분수 끄트머리랑.. 왼쪽에 보이는면이 경사면이구요 펜스모양도 비슷하고(물론 흔하겠지만) 나무도 뭔가 비슷해보이고 그런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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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외벽에 보이는 글씨를 검은색으로 강조 P***CE HO*

2. 그리고 건물 외벽에 보이는 글씨가 P***CE HO*와 같고, palace hotel 정도가 아닐까라는 분석도 나왔다.

 

namdal on Twitter

“@ObserverofCity 초멘 실례합니다! 저도 위치 특정에는 실패했습니다만 도움이 될까 싶어서 ..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조금 더 고화질의 사진을 구했는데요 좌우반전하니 건물 외벽에 P***CE HO* 로 보이는 텍스트가 있습니다 아마도 palace hotel 정도가 아닐까 해요 촬영 당시에도 성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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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고 두 정보를 종합해서 호텔을 찾아낸 사람이 등장하며, 건물(Palace Hotel Princes Street, Einburgh)과 장소(Princes Street Gardens)가 확정된다. (계정 삭제됨)

4. 이를 바탕으로 건물에 대한 분석을 해보았다.

Palace Hotel의 Princes Street 쪽 입면, 이미지 출처: https://www.scotsman.com/arts-and-culture/lost-edinburgh-palace-hotel-1550269

우선 Palace Hotel Princes Street는 완전한 사각콘이고, 소곡집의 사진에선 원형콘으로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는 사진 상 명암 등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고(얼핏 또 사각콘이라고 생각하면 그 경계선이 보이기도 한다...), 그 외의 형태가 전반적으로 일치했다. 특히, 콘 형태의 지붕 바로 옆에 굴뚝이 붙어있는 것으로 쉽게 확신이 가능했다.

 

Castle Street 쪽에서 본 Palace Hotel 이미지, 이미지 출처: https://www.scotsman.com/arts-and-culture/lost-edinburgh-palace-hotel-1550269

Castle Street에 면한 호텔 부분의 지붕에 두 개의 굴뚝 역시 정확히 일치했다. 또한, 호텔의 기초 정보(이름, 위치)를 바탕으로 이 건물은 199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는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는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추측 단서 중 하나인 소곡집 발매년도가 1990년이었고 사진은 그 이전에 찍혔을 테니, 당시 이 건물은 무사히 존재하고 있었던 때였다.

사실 건물 자체는 특징적이었다. 하지만 그 특징적인 건물이 (사진기/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 꽤 오래전에 소실되었다는 점이 이 장소를 찾기 어렵게 만든 지점 중 하나였다. 앞서 런던을 가정한 채로 추측했던 건물 리노베이션이나 철거 추측도 맞는 생각이었다.

 

Lost Edinburgh: The Palace Hotel

TWENTY-TWO years ago the face of Princes Street was changed forever as fire claimed the grand Palace Hotel.

www.scotsman.com

5. 이 정보들을 토대로 더 정확한 사진 촬영 지점을 확정 짓기로 했다.

2013년 구글 스트리트뷰 이미지

사진 찍은 위치는 대략적인 지역과 사진 촬영 방향을 알 수 있으니, 특정 짓기 쉬웠다. 우선 현재 이미지를 찾아보기도 했다. 나름 비교적 비슷한 위치에서 볼 수 있는 2013년 구글 스트리트뷰 이미지로, 나무 사이로 보이는 주황색 원 속의 붉은 계열의 건물이 (과거) 호텔 바로 옆에 면한 건물이다.

 

Google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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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google.com

소곡집 표지 사진에서 보이는 길/건물의 형태를 지도에 표시한 것 (주황색 사진 밖/ 초록색 사진 안) ⓒGoogle Earth (1945년)

피아노 소곡집 1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울타리 바로 안쪽에서 사진을 찍었고, 우측의 울타리의 곡선이 더 휘어 보인다. 심지어 울타리가 두 구간으로 나뉜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두 울타리는 같은 영역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울타리이다. 이렇게 꽤 정확한 사진 촬영 장소를 특정 지을 수 있다. 위 지도상 꼭짓점의 대략적인 좌표는 55°56'59.1"N 3°12'10.9"W이고, 아마도 그즈음에서 꽤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장소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 속에 있는 외딴 성 사진을 모습이 비슷하다며 많이 보내주었었는데, 내가 이 사진 속 장소를 찾는 호기심이 생긴 유일한 이유는 분명하게 "도시" 공원(정원) 같았기 때문이었다.

 

(giggles) on Twitter

“사진 하나로 거기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인터넷. 이번 건은 피아노 소곡집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나쁜 쪽으로 이뤄지는 것을 소셜 해킹이라고 한다. 해킹하면 키모오타가 터

twitter.com

훈훈하게 끝난 것 같은 이 여정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어떤 경각심이 일기 시작했다. 내 방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겐 스토킹 혹은 소셜 해킹의 단서가 돼버리는 것이다. 소셜 해킹은 소셜 미디어 등에 조각조각 게시된 사진, 개인 정보(생일 등), 이동경로, 생활 방식 등을 모아 특정시키는 기법이라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시민으로 자랐다면, 자연스럽게 개인의 정보가 될만한 단서는 넘기면서, 해당 정보의 의도(풍경 공유)만 집어내고 그 외의 것은 넘기는 것이 상식 이어야 한다. (이것도 일종의 디지털 사회 속 시민적 무관심/ Civil Inattention이 아닐까) 하지만 과거 사람들이 손수 검색을 하고 직접 사진을 눈 앞에서 대조해야 했던 시대에나 며칠씩 걸렸던 일은 지금은 몇 분, 몇 시간 안에 가능하다. 벌써 구글 3D도 큰 어색함 없이 이제 작동하는 시대이고 앞으로는 사진 속 특징(예를 들면 원뿔형 건축적 특징과 공원 형태)을 검색하면, 해당 조건에 맞는 지역을 바로 찾아내는 것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게 될 것이다.

기술은 발전하고, 범죄는 더 교묘하고, 치밀하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개인에 대한 보호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내 코로나 감염자 동선 및 접촉자 파악하고 공개하고 있는 수준만 봐도 그렇다. 전혀 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창 밖 풍경 사진이 도리어 나의 가장 사적인 장소(집, 즐겨 찾는 곳)에 대한 단서로 작동해 버리는 세상. 그로 인한 범죄는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겠지만,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의 그 추적 과정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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