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당신을 혐오한다.

2016. 5. 20. 05:13도시와 건축/이야기

 

아마도 오세훈 시장이 디자인 서울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시절인 것 같다. 그때 유니버설 디자인 Universal Design이라는 이름의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보편적 도시환경 혹은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 잠시 크게 유행했었다. 이 말은 돌려 생각해보면, 현재 많은 사람들이 불편 없이 사용하는 제품과 살아가는 공간이 누구에게는 차별화된 혹은 누구를 차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니버설 디자인, 배리어 프리와 같은 이름 디자인은 그 차별을 없애려던 방식 중 하나였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편하고 아름답더라도 세상에는 분명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차별은 계속 존재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세상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성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이는 도시 환경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내가 살기 편한 도시라도, 남에겐 분명 살기 어려운 곳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습, 경제, 문화, 인종, 성 등 다양한 방면에서 존재한다.

강남 번화가에 위치한 한 노래방에서 정신병자에게 한 사람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아니다. 정신병 이력이 있는 남성이, 1시간가량 기다려가며 여성을 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는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 흑인이라서, 아시아인이라서, 남자라서, 여자라서. 살인범과 아무 관계없는 한 여성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죽었다. 물론 여전히 살해범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여성들이 관습처럼 반복된 일상의 차별과 위협에 대해 SNS와 일상에서 하나, 둘 공론화되고 있다.

 

옛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아이를 위한 발판이 있었다. 그 발판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신규 엘리베이터로 교체가 되며 버튼이 누구나 버튼을 누를 수 있을만한 적당한 위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발판은 키가 작은 어린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자전거와 함께 타는 사람에게는 꽤나 불편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아파트의 작은 크기의 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고, 회사 건물 등의 엘리베이터를 생각해보자. 조금 규모가 큰 엘리베이터에는 엘리베이터 입구와 엘리베이터 중간 즈음에 낮은 높이에 버튼이 있다. 사실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게 후자인 것도 다들 체감상 알고 있을 것이다. 후자의 버튼은 크고, 누구든 누르기 편한 높이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키가 작은 이를 배려한) 발판이 있는 엘리베이터 → (손 높이가 낮은 이를 배려한) 낮은 위치의 버튼도 있는 엘리베이터 → (낮은 위치의 버튼의) 엘리베이터 → 엘리베이터

상식의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자행된 차별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다수에게 상식이어도, 누군가에게는 차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낮은 위치에도 배려를 위한 버튼이 따로 존재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만, 나중에는 당연히 적당히 낮은 위치에만 버튼이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엔 낮은 위치에 버튼이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엘리베이터의 표준은 그렇게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별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판이 있는 엘리베이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나 익숙한 것이고, 그게 누군가에게 차별이 된다고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낮은 버튼 설치해주며 생색을 내기도 한다. 그동안 쉽게 버튼을 눌러온 이들이 감히 자신의 희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 없는 세상은 그런 생색내기 배려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자는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들 안전할 수 있고, 다들 손쉽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세상 말이다. 가슴 높이의 버튼을 누르는 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손을 내린 채로 뻗어서 누를 수 있는 버튼이 당연한 세상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술에 취한 남자는 그냥 버려져 있는다. 간혹 누가 도와주기도 한다. 술에 취한 여자는 간혹 누가 도와주기도 하지만, 높은 확률로 강간을 당하게 된다. 남녀 연인이 헤어지면 남자는 헤어진 여성 연인을 살해한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가 헤어진 남성 연인을 살해한 범죄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태어나서 '타인에 의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누구에게 힘으로 제압당해 성폭행을 당할 수 있겠구나.'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일은 정말 드물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각종 성추행에 시달리고, 어쩌면 '타인에 의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 대부분의 범죄와 위험의 확률이 여성이기 때문에 높다는 것이다. 단순히 남성이라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기에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여성 혐오와 여성 차별을 방관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 집단이 지닌 공통의 문제이기에 남성이 지목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목당했다고 남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지 않는다.

 

베를린 공대 건축과 건물은 꽤나 흥미로운 건물이다. 모듈화 되어있는 공간은 쉽게 변경이 가능하다. 메인 계단실은 누구라도 흥미를 자아낼 만큼 시원하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그 모두에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설계실에 들어가려면,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야만 한다. 혼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기란 어림도 없다. 물론 아닌 곳도 있지만, 신체가 멀쩡한 이들처럼 이 건물 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건축과에 신체가 불편한 학생이 혹은 교직원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그런 건축가를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건축은 그런 요소를 신경 쓰지 않으며, 때로는 신체적 제약이 없는 이들에게조차 불편한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신체가 불편하더라도 한 학생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한 시민으로 자유롭게 도시를 거닐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학교는 학생에게 그 권리를 이양할 수 있는 기초적인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고, 도시도 어떤 시민도 언제나 어디서 안전하게 지낼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단순 물리적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를 이루고 있는 많은 조건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 도시는 그리고 이 건물은 내가 이용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애초에 이용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관찰을 해보자. 마찬가지다 남자로서 이 사회에서 사는 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지만, 누군가는 일상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보고, 관찰을 해보자.

 

내가 사는 도시와 공간은 날 혐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에게 너무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차별을 느끼는 공간이고, 혐오의 대상이 됨을 느끼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모를 뿐이다. 남성에겐 강남역 살인 사건과 남녀차별 이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머니, 딸, 여자 친구, 애인, 아내가 당할 수 도 있는 차별과 위협이지, 그게 왜 여성 혐오 사건이냐."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자신이 당할 차별과 위협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친이 강남역살인사건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그게 내 애인이었을 수도 엄마였을 수도 있다는 거였단다. 그래서 답변으로 그래 오빠는 본인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주변 여자가 죽을 것을 걱정하지. 하니까 지금 엄청 충격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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