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1. 20:00ㆍ도시와 건축/이야기
처음 맞이한 만리재 광장의 윤슬은 방학 때 텅 빈 노천 극장을 보는 듯했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그리드의 수직적인 변화가 주는 리듬은 흥미로웠지만, 비교적 금방 그 흥미로움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음악회라던가)과 이 장소를 채운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노천 극장이 그렇듯) 아주 매력적인 장소일 것이란 생각이 드는 장소였다.
"천장에는 스테인리스스틸 수퍼미러 재질의 루버(louver, 길고 가는 평판을 일정 간격으로 수평 설치한 구조물)를 달았는데, 이 루버를 통해 빛이 내부 공간에 투영돼 작품의 이름인 ‘윤슬’처럼 마치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 한 독특한 효과를 낸다." - AURUM 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윤슬 :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은 건축가 강예린 씨의 공공미술작품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뭇 낭만적인 이름으로 느껴지는 윤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공공미술작품 혹은 건축 작품은 서울로의 한줄기에 인접한 만리재 광장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앞에 공공 화장실이 있어서 화장실 이용하는 사람 기다리며 잠깐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윤슬 주변으로는 10년, 20년 뒤에 근사하게 자라날 새로 심긴 가로수가 둘러싸고 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윤슬로 내려가서 쉬기보다는 바로 나무 그늘 아래서 앉아있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화단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꽤 많이 보았지만, 내가 이곳을 둘러보던 30여분 동안 윤슬에 들어가는 사람은 "건축"이야기를 하던 한 커플밖에 없었다.
"윤슬"이라는 명칭이 가진 시각적 의도는 빛이 루버에 반사되어 비출 때뿐만이 아니라, 루버에 반사되는 윤슬 구조의 모습을 볼 때도 느낄 수 있었다. 아래는 빛을 통한 윤슬이 더 확실히 보이는 모습을 찍은 네이버 블로그 포스트
휠체어는 어떻게 진입할까. 시각 장애인은 어떻게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을까. 공간이 "보통" 사람을 중심으로 설계되었을 때 배제되는 문제에 관련해서는 다음 링크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공간이 당신을 혐오한다.
서울로도 전반적으로 그렇고, 윤슬 역시 공모 단계에서 관련 지침이나 규정이 전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간의 규모에 적합한 장소 특징적(space-specific) 참여예술이나 지역 기반 예술 프로그램을 도입해 시민들이 공공미술작품을 통해 예술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운영할 예정이다." - AURUM 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계단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내려온 윤슬 속의 광경을 보고 처음 쓴 것처럼 대학의 노천 극장이 떠올랐다. 이 형태를 보며 노천극장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국 대학의 노천 극장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극장 형태와의 유사성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윤슬은 명백히 일상적인 공공 공간에서의 활동보다는 특별한 활동을 위해 계획된 장소다.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
그리고 올라가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조심만 하면 된다는 것인지 애매한 경고문도 함께 하던 공간.
이 곳에 있는 동안 살짝 비가 내렸다.
부서진 블록도 몇 곳 있었다.
유럽 건물의 전반적으로 높은 층고에 익숙해져서인지, 공공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윤슬 높이 감이 살짝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 부분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느낄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글에서 보니 정확한 깊이는 4m라고 한다. 아래 글에서도 지적한 부분은 제한적인 접근 가능성으로 기후나 시간에 따른 안전 문제로 접근을 제한한다는 점이었다. 공공미술로서 사실 큰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딱히 변하지는 않을/특별한 순간에만 빛날 윤슬이나 서울로보다는, 더 커지고 더 우거질 가로수가 기대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배수통을 막고 1~2m 정도 물을 채워서 아이들 야외수영장으로 써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도 문득 들었다. (블록에 많이 찍힐 것 같긴 하지만)
이 공간의 부족한 접근성에 대해 비판을 했고, 아마도 이 공간을 재개발하지 않는 이상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루버간 간격이 휠체어 간격보다 좁아 보였음) 다만 DDP나 서울로 관련한 비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공공 공간/미술 공모에서는 공모 주최자가 기본적으로 짜놓은 최소한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진 항상 없었고, 이런 겉으로는 근사해보이고, 속으로도 근사해보이지만, 차별과 배제의 공간이 되는 "작품"들이 생겨났다.
앞으로 공공의 돈이 투여되는 공모(물론 민간 프로젝트에서도)에선 보행 약자도 다양한 방식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항상 명시되어야한다. 더 이상 공공공간이 한번 더 한국 사회의 차별적 태도를 재확인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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