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6. 05:45ㆍ도시와 건축/베를린
베를린에 와서 바뀐 생각이 참 많지만,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심각하게 쓰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는 글이기 때문에, 제목은 진지하게 쓰고, 농담조로 마무리 짓는다.
오랫동안 소위 환경결정론과 같은 생각으로 멋진 광장, 좋은 거리 그리고 잘 가꿔진 공원이 더 나은 시민활동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부 설계 당시의 나의 작품 그리고 주변 동기 선후배들의 작품을 보면, 유럽과 미국의 잘 나가는 (보행) 도시의 공공 공간을 따라 하여 한국의 도시 공간을 완전히 바꾸던가 아니면 접목하는 방식의 설계가 대부분이었다. 교수들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마을 만들기'라는 좀 더 풀뿌리형식의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전에 학교를 다녔던지라, 마스터 플래너로 한 지역과 도시를 마음껏 주무르는 게 나의 역할인 줄 알았다.
나름 지역의 역사, 문화적 맥락을 생각하고, 지역의 특성을 생각하는 등 여러 가지 고민이 반영 되었다. 뿌듯했다. 하지만 공간 구성 자체는 항상 유럽의 광장, 거리, 공원의 느낌이었다. 물론 간혹 아무런 외부의 것을 따라 하는 것 조차도 안되는 아무런 맥락 없는 자기만의 (원형, 삼각형, 네모, 오각형, 육각형....) 판타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유럽의 야외 생활 습관이 몸에 밴 유럽인들은 서울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절한 장소를 찾아 소위, "유럽스러움"을 뽐낸다. 물론 적절하지 않은 공간에서 그럴 때가 많다. 그들은 그냥 길거리에 쉽게 주저앉고, 건물 현관의 계단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허접스러운 잔디밭이라도 거리낌 없이 누워 태양을 즐긴다.
베를린에서 좋디좋은 야외 공간들 즐겨 찾는 나에게 항상 의문이 드는 것은, '이놈의 아시아인들은 어디 있느냐?'였다. 이것은 인종 차별이 아니다. 정말 대부분의 소위 핫하거나 야외 활동하기 좋은 장소에는 아시아인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너무나 더러워 보이는 화단 앞에서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차가 쌩쌩 달리는 옆에서 친구들과 기타치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서양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환경적 완벽함보다는 그저 최악만 아닌 공공 공간이 존재하면, 야외 생활을 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 이 아시아인은 단순 외모를 말하는게 아니다. 아시아권 국가에서 태어나 살아온 아시아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외모로 아시아인을 구분하기에는 이미 유럽에도 아시아 외모의 유럽인이 너무나 많다. 피부색과 외모는 적어도 나에게는 인종구분의 잣대가 아니다.
Kreuzberg의 별 볼 일 없는 다리가 하나 있다. 하지만 날이 좋으면 관광지보다 더 사람이 붐비는 장소가 된다. 차, 오토바이가 매연을 옆에서 뿜어대고, 자전거가 지나가는 다리임에도,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수다 떨고, 맥주를 마시고, 음악 연주를 한다. 그냥 그러는 장소다. 동네의 공원처럼 말이다.
가서는 안되는 다리 옆 구조물에 올라가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다. 그 어떤 장소도 좋은 도시 디자인의 원칙을 따르지 않은 너무나 평범한 장소들이다. 그렇지만, 입소문을 타고 그냥 명소가 되었다. 돌 바닥에 앉는 게 그리 편한 게 아니어도, 익숙하다. 이미 다른 데서도 길바닥이나 담벼락 혹은 무너진 건물에서 불편한 공간이지만 와인 마시고 노는 것을 다 해봤기 때문이다.
* 베를린을 계속 소개하지만, 좀 미안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솔직히 베를린은 특정 부분에서 좀 과하게 특별한 도시다. 시민들이나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행동도 특별하고 법의 경계를 심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다리에서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앉아있을 때 적당히 편안한 이렇게 완벽한 경사 그리고 백조와 오리들이 우아하게 거니는 호수 같은 운하를 눈앞에 둔 완벽한 풍경과 공간을 자랑하는 Urban Hafen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와 반면 우리는 최고의 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최고의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이용객도 공급자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너무나 먼 미래를 생각한다. 적당한 공공장소에서 남 눈치 보지 않고 여유 부릴 수 있는 행동을 미루고, 다음에 차 혹은 기차를 타고 멀리 좋은 산과 계곡과 해변 혹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카페, 펜션에 놀러 갈 생각을 한다. 전문가들은 동네의 평범한 공간들을 공공 공간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언제 만들어질지 알 수도 없는 유럽식 광장을 제안하고, 보행자 친화 도시를 외친다.
야외 생활은 개인의 의지와 습관에 큰 영향을 받는다. 도시 공간의 형태나 질은 그 이후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간 형태나 질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공공 공간과 시민들의 공공 생활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개인의 의지나 습관에 영향을 받기에, 또 그것에 영향을 주는 계절이나 날씨 영향, 문화적 특징, 집안 환경, 개인 생활 공간, 신분 등등 수많은 것들이 결부된다.
단순히 건물 디자인이 안 좋고, 광장 디자인이 안 좋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냥 우리는 날씨도 야외생활하기 안 좋고, 생활 방식도 야외 생활과 익숙하지 않고, 무엇보다 야외생활을 즐겨야 하고 즐기고 싶은 젊은이들은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리고 꼭 야외생활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와 우리 도시에 진짜 맞는 공공 생활이 꼭 야외생활인지 아니면 실내 생활과 충분히 섞여 있어야 하는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솔직히 환경이나 날씨 생각하면 야외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1, 2달이 채 안될 것 같은 곳에서 야외 생활을 하는 건 빨리 죽으라는 것처럼 들린다.
햇살을 즐기는 나조차 가만히 있으면 쪄 죽을지도 모르는 한여름의 이탈리아 시에나 광장보다는 서울에 있는 은행의 에어컨 바람이 좋다. 물론 거짓말이다. 광장에 면한 그늘진 카페 가서 젤라또를 신나게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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