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9. 06:30ㆍ트윗

컴퓨터를 샀다. 아마도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이루지 못한 소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가장 비싼 컴퓨터 견적을 짰고(3600유로. 돈도 써본 놈이 잘 쓴다고, 더 높이질 못했음.), 그리고 객관적으로 나의 게임 취향을 생각하면 사실 기능상 과도하게 오버스펙이었던 그래픽 카드를 다운그레이드하고 나니 2800유로 정도의 컴퓨터가 완성이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노트북은 내 삶의 일부였다. 여행을 다닐 때도, 작업실에서도, 집에서도,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다들 들어보고 놀랄 정도로 무거운 노트북을 항상 챙겨 다녔다. 지금도 내가 사용했던 두대의 노트북은 내 책상 바로 옆에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애정과 추억이 가득하다.

영주권을 받았다. 컴퓨터는 거의 확실시되던 영주권 기념 선물이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온 선물이기도 했고, 10년을 훌쩍 넘어선 독일 생활을 기념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줄여 말하면 "독일 땅에서 살아남은 나를 위한 기념"이었다.
유학생 혹은 이민자는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느 순간 살고 있던 나라나 집에서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산다. 거주의 권리 자체가 타인의 판단과 내 사회적 위치에 달려있다. 불안정한 현재를 살며 많은 것들을 미래로 미뤄왔었다. 좋은 가구, 새로운 취미, 심지어는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를 하거나 하는 인간관계까지 말이다. 여행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미뤄왔던 것 같다.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차라리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그런 삶 말이다.
새 데스크톱 컴퓨터로 영상 편집이 아주 많이 빨라졌다. 게임을 하며 프레임 드롭을 느낄 수 없게 퍼포먼스가 좋아졌다. 그렇지만 대단히 바뀐 것은 없다. 이전 컴퓨터도 대단히 빠르지 않지만 나쁘지 않게 영상 편집을 할 수 있었고, 프레임이 종종 버벅거려도 신나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더 비싸고, 더 크고, 더 무거워진 새 데스크톱은 이곳에서의 더 견고해진 내 일상과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제 여기서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독일에 산다. 영주권 언제 받냐는 가족과 주변의 물음에 "뭐 언제가 받겠지? 몰라."라고 대응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 (운이 좋게도) 받으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었던 이 카드 하나를 받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시와 이 나라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물론 갑자기 이곳을 떠날 생각은 1도 없고, 베를린 만한 선택지가 없고, 여전히 나는 베를린을 사랑하지만,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니 오히려 반대의 생각이 드는 것이 이상했다. 이렇게 느낄 줄은 몰랐다.
글을 다 써놓고, 정리를 하고, 살을 붙이고 떼고를 하다가 계엄령 소식이 들려왔고, 며칠 째 일도, 놀이도, 생활도 잘 손에 잡히지 않는 중이다. 내 선택으로 찾아온 땅에서 마침내 평안이 찾아왔지만, 내 존재와 일상을 흔드는 이런 일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뭐든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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