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17. 01:30ㆍ리뷰

베를리날레 프로그램이 공개되면 시놉을 정말 정말 대충 읽어가며 대략 15~20개 정도의 영화를 찜한다. 거진 몇백 개의 영화를 일일이 확인하니 대충 읽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 그렇게 대충 알면 오히려 영화에 더 집중을 할 수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그렇게 단편적으로(주제, 키워드, 포스터, 스틸샷 등) 내가 흥미를 가질 영화라고 추측되는 영화를 선택을 하고 나면, 일정으로 인해 볼 수 없거나, 찜한 영화 간 상영 시간이 겹치는 것을 삭제한다. 결국은 5~10편 이하의 영화만이 남게 되고, 그중에 실제로 티켓 예약까지 이어지는 영화는 2,3개 남짓이다. 베를리날레를 매번 그렇게 즐겨왔다.
몇 주간 눈이 계속 내리다가 처음으로 해가 떴던 일요일 오후 3시. 예약해 둔 베를리날레 첫 영화 『Enjoy Your Stay』상영 시작까지 30분이 남았었다. 갈까 가지 말까 갈까 가지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영화관에 갔다. 게으름을 부렸기 때문에 당연히 남은 자리도 목을 60도 정도 꺾은채로 영화를 봐야 하는 최악의 자리였다. 리뷰를 이렇게 쓴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영화이었기 때문이지만, 정말 너무나도 잘 만든 영화였다. 큰 줄거리는 스위스 럭셔리 리조트의 청소 용역으로 일하는 무허가 이민 노동자들(필리핀)과 그 주변의 이야기인데, 배우분들 한 분 한 분이 모두 연기를 너무 잘해서 영화에 집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민 그리고 불법이민자*는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고(외국인이라는 악몽) 어느정도 이런 주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어서 당연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영화는 존재와 생존을 볼모로 잡힌 이민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마냥 쉽게 볼 수는 없었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호러와 다큐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영화에서 유독 눈에 띄던 것이 하나 있는데, 주인공의 목소리가 무시당하는 장면들이었다. 주인공은 똑똑하고, 셈에도 밝고, 사회성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적당히 있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도 좋고, 일처리도 잘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의 말은 매번 무시당하거나, 경청받지 못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의 사이가 안 좋고 돈을 벌기 위해 딸을 돌려받기 위해 해외로 떠났던 그는 딸과 너무 오래 떨어져서 살았고 딸은 그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 고용주와 고용인 그리고 손님과 용역 노동자의 관계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료는 그의 말을 흘려듣거나 헤드폰을 쓴 채로 제대로 듣지 않았다. 수많은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는 또박또박 자신의 목소리를 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고용주는 종종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금전적 이익과 연관되었을 때 뿐이었다. (노동허가를 위한 브로커 고용, 무허가 이민노동자를 싼 가격에 데려오려고 할 때 등.)
스위스 알프스 산악 지역과 (고급) 리조트의 풍경 속 수많은 백인들 사이 보이지 않는 동남아 이민 노동자들이 비추일 때는 그 풍경 자체로도 호러였고, 영화의 이야기도 현실적이라 잔인했고, 뒤에 앉은 백인 관람객이 이상한 포인트에서 웃어 제끼는 것도 짜증났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좋은 영화였다. 특히, 이런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있음에 그리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어서 작은 희망을 품어볼 수 있었다. 참고로 감독님 QnA에서의 말로는 스위스에서 이런 불법/무허가 이민노동자에 대한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스위스와 노르딕/북유럽은 언제나 인종차별적인 지역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 확신을 더해주었다...)
* 나는 "불법"인 이민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주로 무허가 이민자라고 차라리 칭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허가를 못 받았다고 우리가 불법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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