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날 이런 식으로 울린건 너가 처음이야,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5. 3. 9. 17:30리뷰

홈 프로젝터 로망 중 하나였는데, 얼마전 구입해서 정말정말 잘 쓰고 있는 중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았다. 사실 울지는 않았는데, 내가 좀 더 공감이나 감정이입 잘하는 타입의 사람이었으면 눈물 펑펑 터졌을 순간들이 많았다. 이민자를 다룬 그리고 그 이민자를 그리워하던 이를 다룬 굉장히 특수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국에서는 별 인기가 없었다는 이유가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1. 이민자에 관한 이야기: 단짝을 이민으로 인해 상실해 본 적이 있는가?

새로운 세상에서의 12년 세월을 이 한 장면에 다 담은 셀린 송 감독님 ㅠㅠ

내 초등학교 시절 단짝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가끔씩 한국에 돌아올 땐 우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중학교 때는 역이민을 와서 또 긴 기간 함께 추억을 쌓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나와 돌아간 친구. 이민은 언제나 남겨진 사람과 떠나간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남겨진 이와 떠나간 이는 생각보다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방학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군대를 다녀오고, 각자의 SNS에 각자의 이야기와 삶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서로 알게 될 때 즈음 나는 우리의 단짝 시절 그리고 우리의 어린 시절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유년 그리고 청소년 시절의 이민은 보통 가족의 결정으로 인해 이뤄진다. 나영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그가 이민을 가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해외에 살다 보면 친구를 만들기 어려움을 자주 겪곤 하는데, 개인적으로 제일 큰 장벽은 문화적 뒷배경이 서로 상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 하면 어 하고 어 하면 아 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돌고 돌아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끼리 만나게 된다.

이민자는 이 국가적 정체성을 넘을 수 있는 범국가적인 문화적 뒷배경을 공유하는 정체성이라 생각한다. 이민자로 정제화한 사람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셀린 송 감독은 노라의 12년을 한 장면으로 녹여냈다. 아마 이민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깊게 상상을 하지 않고 공감하지 못한 채로 넘어갈 수준으로 아주 짧게 그려진다. 그 이후 바로 이어지는 해성의 군 장면도 마찬가지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과 군대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과 별생각 없는 사람이 그 짧은 장면을 인식하는 데는 분명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첫 영상 통화에서 잠시 이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에 해성은 "그랬구나."로 반응하고, 나영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린다.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서로 서먹해질 이유도 분위기가 어두워질 이유도 없던 반가운 첫 만남이었다. 이들이 서로 연락을 하지 않길 통보하는 마지막 통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이민을 갔다는 말은 하지만 더 이야기를 이어가진 않는다. 그 말들에 축적된 내용은 이민자로서의 경험이 없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어느 때보다 동시대인이 비슷하게 살아가는 시대에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이민자는 이민자가 아니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경험이 축적되며 그렇게 점점 모국에서 멀어지게 된다. 모국을 상징하는 해성에게서 말이다.

2. 롱디에 관한 이야기: 장거리 연애를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잘 시간. 너는 일어날 시간. 시공간을 이겨야하는 롱디.

오랜만에 듣는 페이스타임 소리가 조금 구슬펐다. 이제는 딱히 들을 일도 없겠지만, 너무나 많이 들었던 그 소리. 서로의 시차를 확인하고 서로의 일정을 확인하고 서로의 컨디션을 확인해 가며 겨우겨우 만들어내는 통화의 시간. 롱디를 하면 침대에 누워서, 새벽에 술집에 있을 때도, 친구들과 담탐을 가질 때도, 주변의 남들과 완전히 함께할 수 없는 다른 시공간에서 사는 삶이 생기게 된다. 그 삶이라는 것은 상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더라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의 무력감이 함께한다. 인터넷이 불안정할 때마다 반복되는 공허한 여보세요 혹은 들려 소리, 각자의 삶에 지쳐 쓰러져 정해진 시간에 통화를 할 수 없을 때의 그 허망함까지 더해지는 삶.

서로 연락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이야기를 한 뒤, 영화는 노라의 일상적인 삶 그리고 해성의 일상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들이 영상 통화로는 함께 할 수 없던 서로의 삶 말이다. 롱디라는 것은 사실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이들의 끈질긴 노력처럼 느껴진다. 달콤함 비극. 영화는 그걸 디테일하게 정말로 잘 묘사한다. 감독님이나 작가들 중에 롱디 유경혐자가 있는 것처럼. 나는 정말 사소한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영화 내내 내 경험이 투영되면서 너무 표현을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롱디가 어려운 것은 공간차보다는 시간차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그 시간차의 감각을 영화 속에 잘 그려냈다.)

3. 언어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절친의 애인과 대면을 해본 적이 있는가?

"You dream in a language that I can’t understand. It’s like there’s this whole place inside of you where I can’t go."

영화에서 노라의 남편은 비중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공한 백인(유대인)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별 어려움이나 관심받지 못함을 느끼지 못했을 부류의 사람. (예. 좀 납작하게 표현하겠습니다.) 영화에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그는 끊임없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정체성과 언어에 대한) 미묘한 질투심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 보여준다. 내가 과대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 속에서도 남편은 노라의 한국어 꿈 이야기를 하며 실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렵다(scared)고 표현한다.

노라가 해성과 첫 만남을 가진 후 히 이스 쏘 코리안 코리안. 코리안 코리안 등등 문장마다 코리안을 내뱉을 때의 남편의 모습을 유심히 보길 바란다. 그 연기를 너무 잘해서 이 사람 상 주고 싶을 정도다. (동양인이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백인에게 또 상주고 싶은 나 자신 반성하라!)

얼마 전 절친이 베를린에 놀러 왔다. 한국어를 할 줄 모르고 한국 문화를 잘 아는 것은 아닌 유럽 백인 애인과 함께.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내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한국어로 많이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고 했고, 그는 자신의 애인이 한국어로 이야기할 기회가 이렇게 있어서 좋다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어느 순간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핏 얼핏 봤던 그의 표정과 얼굴이 영화 속 남편에게서 느껴졌다. 이민자의 정체성에 언어문화적 정체성까지 그들에겐 우릴 이해할 수 없는 코드가 두개나 있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니 이 정도로만 짧게...)

마지막: 어린 시절과의 작별

마주할 수 없었던, 그래서 인정할 수 없었던,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이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성과 나영은 서로를 오랫 시간 서로 바라본다. 사실 서로 너무 오래 바라봐서, 왜 저래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영화 속 장면이 있었다. 헤어짐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 시절의 그들이 서로를 제대로 응시할 수 없던 골목길 이별 순간 말이다.

그들은 20년이 흘러서야 서로의 이별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두려움 없이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 노라는 울음을 터뜨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우버를 타고 담담하게 뉴욕의 마지막 풍경을 바라보던 해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나보내고 (진짜 어른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진짜 어른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인연이 끝이 났음을 확인하는 것은 오랜 연인과의 헤어짐 마냥 그렇게나 슬픈 일인 것이다.

이제 어떤 사람이 나와 비슷한 시각으로 이 영화를 이해했나 검색할 시간이다. 나와 이 영화의 인연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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