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9. 17:00ㆍ리뷰
썸네일을 교체하라!
리뷰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이 매력적인 드라마 시리즈의 흠을 찾으라면 남주와 남주 얼굴이 박혀있는 시리즈 썸네일을 꼽고 싶다. 소재: 흥미로움. 전개: 나쁘지 않음. 배우들: 매력 있음. 기승전결: 생각보다 깔끔했음. 이 드라마의 유일한 문제는 포장지에 있다.
2022년에 나온 이 시리즈는 2025년 현재 독일 애플티비 트렌드 랭킹 2,3위에 꾸준히 올라와 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추천과 좋은 평을 엄청 들었음에도 이 끔찍한 썸네일 때문에 정주행을 시작하기 꺼려졌었다. 꾸역꾸역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시청한 이 시리즈는 재미있었다. 편당 약 50분, 에피소드 10개, 시즌 2개 어떻게 보면 좀 부담스러운 양일수도 있지만, 다음 화가 항상 기대되는 시리즈였고, 빠르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아무튼 스포일러 꽤 있는 리뷰 시작.
공과 사
컨셉이 재미있다. 정신을 혹은 영혼을 혹은 내 몸과 생각을 작동시키는 무언가를 단절시켜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만 작동하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 인간은 일만 하는 노동자가 된다는 것. 노동을 하는 자아와 노동시간 외의 자아와의 완벽한 단절. 얼핏 생각하면 공과사의 구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꿈의 기술처럼 느껴진다.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그런 생각은 단숨에 사라진다. 단절층에서 처음 만난 이들이 서로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이 공적 자아 그리고 노동만 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납작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스로를 소개할 것이 없는 인간. 그 모습을 볼 때 동시에 공적인 직장 생활에서 나의 사적 자아는 얼마나 섞여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까지 내 사적 자아를 공개하고 공유해되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시리즈는 단절이 만들어낸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이 공과 사의 충돌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준다.
그들의 세상
영화는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계속 보여준다. 특히, 시청자가 보기엔 끔찍한 디스토피아이다.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그들의 세상을 재단하기 시작할 때, 시리즈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 둘 보여주기 시작한다. 노동을 위한 자아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자아 말이다. 허락 없이 만들어진 사실상 복제품인 이니들은 (Innie: 단절 층의 자아/사람을 일컫는 말) 단절층 안에서 자신들만의 존재가치를 찾기 시작한다. 일을 잘하는 것부터, 사랑을 찾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일하는 곳의 비밀을 찾는 것까지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을 재단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절이라는 기능은 엘리베이터를 통해 특정 지하층/공간에 다다를 때 작동한다. 그렇기에 모든 이니들은 단절 기능이 작동하는 엘리베이터 외부의 공간으로 떠날 수 없다. 물리적인 신체는 떠나지만 그들의 정신은 그곳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의식이 꺼지고, 엘리베이터에서 의식이 켜진다. 우리가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고, 놀고먹고 하는 그 모든 여가 및 개인 시간이 생략된 채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노동의 시작과 끝이 무한궤도처럼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단절되는 장면을 시리즈 내내 반복적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보여주는데, 굉장히 잘 만든 장면과 컨셉이라고 생각을 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그 장면이 끔찍해서 현실에서 소리를 칠 정도였다. (+별개로 아우티가 이니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상황도 정말 흥미로웠음.)
회사라는 공간
나름 직장 생활을 이제 10년 넘게 하고 있는데, 단 한번도 회사 책상과 내 공간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첫 회사 첫 출근 아침부터 퇴근하고 퇴사하고 싶었던 사람이라서, 회사는 디폴트로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떠나고 싶는 곳이라 내 물건을 1도 안 갔다 놓으며 살았다. (핸드크림 하나 항상 올려놓는 듯.)
반면에 짧은 시간 회사에 있으면서 자신의 물건을 가져다두고 정을 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 드라마에서 회사 공간은 무개성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모든 것이 모듈화 된 채로 획일적이라 어디가 어딘지 쉽게 구분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전체적인 공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곳. 이 무개성적인 공간은 항상 내가 교체가능한 부품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이 드라마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그걸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퇴사를 한 직원의 자리가 다음날 없어져있는 등.)
이 드라마의 컨셉상 제일 좀 웃겼던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굉장히 정중하고 동시에 유치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과도한 폭력도 없고, 과도한 욕설도 없다. 일을 하며 얻는 모든 보상과 벌칙이 유치하다. 일도 유치하다. 직원과 상사는 서로를 존중하는 말투로 대하고, 물리적인 제재도 사실상 없다. 서로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만, 그것은 이미 촘촘하게 짜인 지배구조에서 벌어지는 허울 좋은 매너일 뿐인 것이다.
아무튼 보세요. 썸네일 디자인에 의지 꺾이지 마시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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